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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일이었다. 비밀스럽게 진행된 계획에 불청객이 난입하여 훼방을 놓는 일이 최근 들어 유독 잦아졌다. 오늘도 그랬다. 분명히, 그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몇 없었을 텐데. 알베르는 흰, 아니 희던 장갑을 벗어 테이블의 가장자리에 올려놓았다. 넓은 테라스에 은은하게 닿는 붉은빛이 장갑을 물들인 선혈을 비췄다.

 

짙은 핏빛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알베르는 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오늘의 일에 대해 미리 알았던 이는 보스, 그와 동급의 간부, 그리고 일을 수행할 소수의 부하들뿐이었다. 부하들부터 심문해 봐야 하는 건가, 중얼거리며 와인잔을 다시 입가로 가져가던 손이 흠칫 멈췄다.

 

그래, 한 사람 더 있었지.

 

의심할 만한 이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의심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해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알베르는 꼭 '그'의 머리색과 닮은 와인을 다시금 들이키며 아무것도 없는 곳을 빤히 응시했다. 모래알마냥 삭막하던 눈동자에 잠시, 타오르듯이. 무언가가 들어찼다.

 

어떤 것을 소망해 본 지가 오래된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무척이나 생소하지만, 알베르는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정의하기는 어렵지 않다 판단했다. 와인잔을 내려놓고 손을 닦은 그가 천천히, 일어났다. 네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아크.

 

 

 

"알베르."

"응."

"요즘 부하들을 심문한다며?"

 

서류를 향하고 있던 연둣빛 눈이 아크에게 옮겨졌다. 질척하게 달라붙는 것만 시선에 아크가 고개를 돌리려 할 때쯤 평이한 알베르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누가 그래?"

"그냥, 얘기가 들리던데."

"어디서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맞아. 아무래도 프락치가 있는 것 같아서."

"프락치라면, 스파이?"

"그래. 그것도 꽤 고급."

 

태연히 포장된 시선이 아크를 훑었다. 알베르가 조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들어온 아크는 그에게 있어 친구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고, 이곳에서는 정말로 유별나게도 살생을 꺼리는 사람이었다. 주어진 임무라면 수행하지만 눈빛이며 행동거지에 누군가를 죽인다는 행위에 대한 거부감이 지독히도 묻어나는.

 

알베르의 내면에 점철된 프락치에 대한 의심과 경계에서, 아크는 지극히도 의식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알베르는 아크를 의심하느니 보스가 조직의 궤멸을 꿰하고 있다고 생각하겠노라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데 아크, 너는 어째서 스파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런 눈빛을 하는 걸까. 어째서 나를 찾아와서 굳이 그에 대해 묻는 걸까.

 

그는 아크의 겉에 드러나는 그대로를 보았고, 그대로를 믿었다. 사람에게 총을 겨눌 때 애써 무표정을 하려는 듯 보이면서도 손의 잔 떨림과 함께 입술을 지긋이 깨무는 아크를. 그는 감추는 것에 지독히도 소질이 없었다. 다른 이에게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알베르에게는. 알베르가 아크를 더욱 유심히 보고, 항상 세세한 것까지 살피기 때문일까.

 

"아크."

"…응?"

"넌 내 친구지."

 

의미심장하게 떨어지는 말에 아크는 눈을 깜빡거리며 알베르를 보았다. 짙게 가라앉은 녹안이 평소보다 냉랭하게 그를 담고 있었다. 의문일까, 확인일까, 혹은 그 자신에게 내리는 다짐일까. 알베르는 감정이 지극히도 배제된 얼굴로 아크를 보았다.

 

"그렇지?"

"...물론, 당연하지. 내 가장 소중한 친구잖아?"

"...그래, 그럼 됐어."

 

대체 그 안에 무엇이 꾹꾹 눌러진 채 담겨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목소리가 대화의 끝을 고했다. 알베르가 얘기를 이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아크가 등을 돌려 나가는 그 찰나까지, 숨죽여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것마냥 날카로운 눈빛이 그 뒤를 쫓았다.

 

문이 닫혔다. 기이하도록 깔끔한 방에는 공허한 정적만이 남아 있었다. 다른 것 하나 없이 하얀색으로 뒤덮인 방에 유일하게 자리한, 서류더미가 놓인 고풍스러운 협탁.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흑색 권총. 숨막히는 부조화 가운데에서 알베르는 아래쪽 서랍을 힘주어 쓸어내렸다. 아크가 오기 몇 분 전, 그것을 넣고 닫아 두었던 서랍을.

 

왜일까. 어째서 그는 이리도 아크를 경계하나. 알베르가 가끔, 그러니까 이런 때에.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아크를 의심해서는 안 되는데. 그에게 아크만큼 소중한 사람은 없었고, 아크 또한 그가 소중하다 말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은 사그라들면서, 아크를 향한 의심은 점차 크기를 키워나가는 것일까.

 

아크는 프락치가 아니라고, 단지 조금 여린 조직원일 뿐이라고 증명하기 위해서. 변명일지, 그의 진심일지는 모르겠으나 알베르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이리 답하곤 했다. 수상함과 미심쩍음을 스스로에게서 은폐하며. 누구보다 가깝기에 알아챌 수 있는 위화감을 감추며.

 

"만약 네가. ...내 친구가 아니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요즘 들어 혼잣말이 늘었네. 알베르가 허탈함 담아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는 오늘도, 결코 답하지 못할 물음을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아크는 아찔한 정신을 붙들고 알베르의 방에서 나왔다. 오늘따라 평소보다도 날카롭고, 그의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알베르의 시선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들킨 걸까? 알베르가 부하들을 심문해 스파이를 색출하려 한다는 말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비록 잠입을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접근한 거라고는 해도,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임은 확실했기에 알베르가 그를 의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조금 전 알베르는.

 

어디에서 드러난 것일까. 마음 붙일 곳 없고, 누군가에게 마음 붙여서도 안 되는 이곳에서, 단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가까워진 사람인 알베르에게 어느 정도의 친밀함을, 그리고 정을 느낀 게 이유였을까. 그라면 어느 정도는 믿어도 된다고 생각해서, 허용되지 않은 신뢰를 감히 품었기 때문에?

 

알베르 정도의 위치와 능력을 가진 이라면 그가 스파이라는 것을 알아내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벌써부터 감을 잡고 있다고? 아크는 서늘했던 눈빛을 떠올렸다. 지독히도 냉철하고, 얼어붙은 채 가라앉은 눈이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도 알기 힘든 구석이 있는 그 모습은 지겹도록 겪은 알베르였지만, 그런 태도가 아크를 향했던 적은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와, 긴장했던 몸을 뉘인 아크가 얼굴을 손으로 덮으며 중얼거렸다. 왜 배신감을 느끼는 거야. 알베르가 끝까지 나한테만은 다정할 줄 알았어? 그가 느끼는 이 기분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슬퍼졌다. 이제 정말로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정의감에 선택한 일이면서, 그 정의에 완벽히 반대되는 사람에게 품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꾸준히 가져서. 왜 그래서, 각오했던 죽음과 감내하던 고통이 이리도 시리게 느껴지는지. 오랜만에, 울고 싶어졌다.

알베르와 아크 사이에는 차가움이 섞여 들어간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믿고 싶어, 믿으면 안 되는 거였어. 관계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비틀림은 드디어 둘 모두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알베르도, 아크도.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대화의 빈도가 줄었다. 가끔 오가는 대화는 짧았고 그 밑에 새까맣게 칠해진 의심과 회피가 혹시라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도록 어느 선에서 끊기곤 했다.

알베르가 다시 아크를 불렀다. 그 후로 한동안 없던 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떨리는 느낌에 눈을 감고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후, 문을 두드렸다.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아직 그를 마주하지도 않았는데 숨막히는 불안감이 아크를 덮쳐 왔다. 왜 부른 것일까, 그동안의 어색함은 껄끄러웠지만 그래도 차라리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를 파고들던 배신감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울분도 회피하고 살 수 있었으므로.

"…알베르."

알베르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아크를 대하는 태도를 제외하면.

소름끼칠 정도로 차분하고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이 아크를 마주했다.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열리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건조함 속에 뜨겁게 짓씹힌 이름을 불렀다. 살짝 기울여진 고개, 싸늘하게 얼어붙은 표정, 그리고 탁자 아래 감춰진 손. 아크는 머리에 오싹함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체념이 찾아들었다. 직감과도 비슷하게, 그에게 찾아온― 어쩌면 예정되었던 수순이었을 그것을 맞이하며.

"너는 믿고 싶었어."

"…그래서, 결국엔?"

"왜 그랬어, 아크?"

들이밀어진 총구보다 미묘하게 떨리는 알베르의 목소리가 더 괴롭게 느껴졌다. 나도, 너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 말고 다른 사람에게 접근했었다면. 만약에 그랬다면, 나는 스파이라는 걸 들켜도 아무런 고통 없이 최후를 맞았을 텐데. 자책과 후회에 일그러진 얼굴로 조용히 눈을 감고, 아크가 속삭이듯 말했다.

"죽어도 너한테만은, 죽고 싶지 않았어."

"……."

"…그래도, 후회는 없어. 알베르."

작은 웃음, 혹은 울음 비슷한 것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죽음까지도 한결같은 그 올곧음에 대한 실소일까. 아니면 유일하게 스스로도 친구라고 여겼던 이를 죽이게 된 것에 대한 유감의 표시일까.

정적이었다. 총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두가 숨죽인 채 그 상태로 있을 뿐인. 아크는 살며시 눈을 떴다. 총구는 거둬진 채였다.

"떠나든, 남든 말리지는 않을게."

"알베르?"

"잘 판단해, 아크. …후회하지 않게."

그렇게 말하는 알베르는 비로소 홀가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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