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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팬

아이가 심연에 떨어지고 난 뒤 몇 년이 지난 지 나는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눈앞에서 새까만 무언가가 그 아이를 끌어당기는 모습을 꿈이라 판단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어루만지는 내 손에 담긴 온기는 심연 너머로 모조리 빨려 들어가 싸늘함만을 남기고서 사라져버렸다. 누군가가 나를 비웃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나 모순적이게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환청이 들리는 것인지.

 

꽤 오랜 시간 동안 큭큭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비웃어대던 웃음마저 사라지고 나자 적막한 침묵만이 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내 착각이었던 것일까.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 지났지만 나는 시간의 흐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의 시간은 여전히 그 아이를 잃기 전으로 정체되어 있었으며 반복되는 일상에 대해 아무런 감상을 자아낼 수가 없었다. 언제나 지루했고, 살생에 대해서는 무감각, 네가 없는 끔찍한 시간은 부정적인 감각만 푹푹 가슴을 찔러댔다. 존재 여부도 모르는 와인 빛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였지만 영악했던 나는 꽤 성실한 군인으로 활동하여 어느새 대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나의 몸은 언제나 전장을 누비고 다녔지만, 머리는 항상 너와 내가 그 약속을 하던 나무 아래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멍한 머리를 굴려 나의 육신이 머무르는 곳이 어디인지 파악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멈추어버린 시간을 안고 고된 일에 매달려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고 있던 나의 육체는 어느새 생명력을 잃은 그 땅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베르딜, 야만족의 땅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네가 배신을 하고 뛰쳐나갔던 곳, 너를 잃어버린 곳. 너, 너, 오직 너에 대한 기억만이 이 쓸모 없는 곳을 의미 있는 장소로 탈바꿈 하였다. 이곳은 내게 끔찍한 기억만 우겨 넣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항상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임무가 없더라도 억지로 발을 끌고 들어오고, 네가 사라진 곳에서 다시 한 번 절망하고, 네 이름을 외치고, 널 찾고. 정말 바보같이.

 

“군복을 입고 있어 동족으로 파악되지만 팔에 이상한 것을 단 자가 빠른 속도로 이 곳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군 내 사상자는 파악 불가. 쓰러진 야만족들을 데리고 가려는 것을 시도하려는 듯합니다.”

 

무미건조한 가면을 쓴 마법 병사-당연히 내게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한 명이 내게 보고를 올렸다. 침입자를 가정한 배신자, 분명 내게 아무런 감각도 새길 수 없는 주제일 텐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지 나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동족, 야만족들을 지키려 한다는 것, 군복을 입고 있다는 것. 그것은 근거가 빈약한 희망에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이었다. 그 아이 말고도 희박하지만 군 내의 배신자는 존재는 하고 있었고, 이번에도 그런 녀석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었다. 매번 아무 감각 없이 배신자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나의 차가운 감정이 왜 조금씩 데워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근거리는 내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보고받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너다. 그곳에는 네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 멈추어버린 시간이 흘러간다. 모든 감정이 기쁨으로 매워져 다른 감정은 제구실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태양 빛을 받으면 밝아지는 너의 와인 빛 머리카락, 유리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투명한 눈동자. 그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네가 그곳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어째서? 왜 나를 노려보는 거야. 내가 널 위해 얼마나…

 

“그런 건 오만일 뿐이야.”

 

심연의 대가인 건지 왼팔에 이상한 것을 매달고 있는 네가, 그날과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네가, 내게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지껄였다. 참 현실적이지 못한 생각이었다. 충격을 받은 그 순간부터 너는 나약하고 헛된 이상만을 좇을 뿐이잖아. 흔들리는 눈을 하고 있었으면서 결국 우리의 사명을 거스르고, 결국 배신을 해버리고, 심연에 끌려가 버리고.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반가움이 앞서던 마음이 실망으로 채워져 간다. 당장이라도 널 붙잡고 구구절절 대화를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다. 네 안전을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더 말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내가 그 아이와 무슨 관계인지 이 곳에 존재하는 이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주제가 아니겠지. 그 녀석들이게 이 아이는 침입자일 뿐이니까.

 

널 산송장이라도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두들겨 팼다. 온몸에 상처가 난 너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눈을 바라보았다가는 이 이상한 짓거리를 한 것이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아 뒤돌아보지 않았다. 베르딜의 샛노란 전장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몸이 미련으로 물들어버렸다.

 

*  *  *

 

그 날 이후 세상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지나갔다. 임무를 하고자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씩 널 마주했다. 그 시간은 더욱 더 빨리 지나가는 듯 하여 참 야박하다고 생각했다. 멈추어버린 시간이 갑자기 흐르기 시작하면 그것은 얼마나 빠른 건지.

 

약속이니 뭐니 네가 내뱉는 모든 말을 쓸데없는 것이라 내 입은 주장하고 있었지만 실은 나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항상 네 얼굴을 살폈다. 네 입은 내 이름을 머금었고, 네 눈은 내 눈동자를 머금었다. 네 눈은 참 예뻐. 네 본래의 유리 같은 눈동자는 투명했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지어 심연의 세례를 받아 노랗게 물들어버린 그 눈동자마저 사랑스러워. 너는 내 마음을 모르겠지. 넌 참 단순한 녀석이잖아.

 

가끔씩 만나는 것이 마음이 들지 않았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의도적으로 그 아이가 지나다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 몸을 무엇인가가 갉아 먹었다는 사실은 불쾌했지만, 무릎을 조금만 숙여도 팔이 땅에 질질 끌리는 그 모습이 귀엽다. 날 쫓는 너의 눈동자는 한결같았다. 한결…같은 건가?

 

 그 아이의 눈동자가 이상하다. 미련을 뚝뚝 쏟아내는 수도꼭지를 누군가 잠궈 버린 것인지, 만남이 이어질수록 그 아이의 눈동자에서 미련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불안했다. 나는 그 시절에 정체되어 있는데 너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살고자 발버둥 치는 자들의 편에 서겠다는 짜증나는 신념을 가슴 속에 새기고, 멈추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건 불공평해. 나 혼자만 널 향해 다가가려 하잖아.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너는 모르면서, 내가 내뱉는 말에 상처받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미련을 버려가는 행세라니.

 

나는 이기적이었다. 내가 한 행동을 고려하지 않고 네 행동을 판단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이기적이잖아. 난 네 한정으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이고. 소유욕이 생겼다. 그 아이를, 그 아이의 눈동자를 가지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자그마한 계획을 하나 세웠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 아이가 망각을 일으키는 호수를 지나갈 때 힘을 주어 밀어버리고, 건져내어 기억을 잃어 텅 비어버린 그 아이의 눈동자에 사랑을 새겨 넣으면 된다.

 

그날에 머무르고 있는 그 아이의 체구는 작고 연약하여 툭 치는 것만으로도 호수의 깊은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축축하게 젖어있는 그 아이를 품에 안고서 내 저택으로 향했다.

 

*  *  *

 

그 아이가 눈을 떴다. 투명한 회색빛이 조금 섞인 푸른 눈동자가 날 응시했다. 그 올곧은 눈동자는 다른 것을 담지 않고 오직 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아이를 완전히 가졌다는 느낌에 정복감이 들었다.

 

“알베르.”

 

라고 내 이름을 부르는 네 입술이 참 어여쁘다. 나는 오물조물 귀엽게 다물린 그 아이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고서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달콤한 향이 났다. 그 아이의 모든 것은 이제 나의 것이 되었다. 다정함을 가정한 소유욕이 그 아이가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못하도록 달콤함을 새겨 넣었다.

 

“넌 참 단순해. 그렇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바라보았다. 난 아무런 설명 없이 다시 그 아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사라졌던 온기가 내 손안에 들어왔다.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았는지,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부터의 시간은 그것보다 훨씬 길 테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이라는 시간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의 손을 잡고, 너를 내 품에 끌어안아 네 입술을 맞추고, 네 눈동자를 손에 쥘 그 시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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