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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기억의 불빛

두운 곳에서 눈을 떴다. 그곳은 정말, ‘어두운’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곳이었다. 아니, 어둠 그 자체였다. 우습게도 나는 나 자신의 손을 볼 수 있었다. 이건 꼭, 내가 등불이 된 것 같잖아. 나에게서 나오는 빛마저 잡아먹는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무거운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에 닿는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베르딜의 텅 빈 황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나는 막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나. 차라리 나도 모르는 척 그들과 동화되었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일어났어?”

 

낯익은 목소리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향해 뒤돌았다. 알베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반가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한 발짝 다가갔다.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에서 그의 눈을 닮은 초록빛의 불꽃들이 일렬로 줄을 섰다. 어둠이 환하게 물러나자 기괴하고 웅장한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웃는 낯의 그는 다리를 꼬고 제 무릎 위에 동그랗게 다섯 손가락을 맞댄 손을 얹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토록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던 적이 있었나? 아니, 아니었다. 이질감이 느껴져 나는 그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아크, 기다리고 있었어.”

“… 알베르가, 아닌 건가?

“너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 가족이나 그런 게 아니라 고작 친구여서 조금 놀라긴 했어. 아아, 친구가 아니었나? 너희 둘의 관계를 보통의 친구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베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러도록 해.”

“알베르가 아니라면 넌…, 누구지?”

“림보를 기억해, 아크?”

 

미소를 띤 입가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어금니를 깨물었다. 기억이, 났다. 근원의 지식, 스펙터, 추악한 하이레프들. 그는 나에게 배신자의 낙인을 찍어 근원의 지식을 위한 ‘숭고한 의식’의 제물로 나를 바쳤다. 죽거나 자아 없는 스펙터가 되거나, 어느 쪽이든 그에겐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죽은 걸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알베르는 눈을 접어 웃었다.

 

“일단, 네 물음에 대답하자면 넌 아직 안 죽었어.”

“…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걸 알았지?”

“내가 모르는 것은 없으니까.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1분 뒤에 무슨 생각을 할지, 1시간 뒤에 무슨 행동을 할지,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 뒤의 네 미래 이미 다 알고 있어. 덕분에 조금 지루하긴 하지만.”

“도대체….”

“‘도대체 넌 누구지?’라고 묻고 싶은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다 알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

“하하, 그렇게 경계하는 표정은 짓지 말고. 그럼, 늦었지만 자기소개나 해볼까. … 나는 근원의 지식의 주인이자 그 자체야.”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근원의 지식을 마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말이 거짓이라면, 도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 이러는 것인지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나에게 떨어지지 않는, 투명한 시선을 마주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니, 호기심은 아닐 것이다. 그와 내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너는 왜 알베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기껏 살려놓은 너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알베르의 모습을 이용한 건가?”

“음, 여러모로 이유가 있지만. 어차피 말해줘도 다 잊어버릴 텐데.”

“근원의 지식에 도달한 사람은 없으니까?”

“자, 적대심은 풀고 일단 여기 앉아보지 그래.”

“대답해.”

“우리 차나 한잔 하면서 대화를 하자고.”

 

하얀 차구들이 올려져 있는 탁자와 의자가 연기처럼 등장했다. 믿을 수 없는 상대를 노려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푹신하게 감싸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차향이 은은하게 공간을 채웠다. 팽팽했던 공기가 가득 찬 향기로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야?”

“…없을 리가 없잖아.”

“그중에 몇 개는 이미 대답했잖아, 안 그래?”

“대답을 못 들은 게 더 많아.”

“미리미리 대답하고 싶은데, 그럼 네가 기분 나빠할 테니 하나하나 물어봐, 그럼.”

“여기가 어디지?”

“멍청한 질문이니 넘기고 싶지만, 답해줘야지. 내가 있는 곳이면 뭐겠어, 근원이지. 또 다른 말로는 심연이고. 어때, 내 성 같은 감옥이 네 맘에도 들어?”

“두 번째, 알베르의 모습을 한 이유는.”

“너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서 그렇다니까. 그리고 어차피 다 알게 될걸.”

“내가 죽지 않았다면,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곧 눈을 뜨긴 할 거야.”

“림보가 실패한 건가 보군.”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했지.”

 

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근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림보, 이름만으로도 불쾌한 작자라서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너, 그 레프를 정말 싫어하는구나, 재밌다는 목소리로 말을 던진 그가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흐음,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대의적인 이유도 있으니까?”

“….”

“난 림보가 좋아. 멍청하거든.”

“…멍청하다고?”

“아크, 근원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만큼 근원에서 멀기 때문이야. 공허감에서 이것저것 덧붙여 꾸며내고 갈구하는 거지.”

“근원에서 멀기 때문에….”

“정말 극단적으로 간다면 근원이 뭔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근원이라는 간판을 탐내는 사람도 있고,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면 누군가를 더 쉽게 해칠 수 있기 때문에 근원의 칼날에 손을 뻗는 사람도 있지.”

“… 제른 다르모어와 하이레프들을 얘기하는 건가.”

“그들은 근원을 몰라. 알 수도 없어. 실제를 알면 그럴 리 없다고 모든 것을 부정할 게 뻔하고. 그래서 거짓으로 속여두고 있는 거야.”

 

말을 마치고 평안한 얼굴로 차를 홀짝이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이레프와 제른 다르모어를 조롱하는 알베르라니, 이런 곳에서 그가 아님을 깨닫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손에 들린 찻잔이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 근원이 도대체 뭐기에.”

“그러게, 그게 뭐라고 그렇게 집착을 할까.”

“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 알고 있으니까 이러는 거지. 결국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렇게 자신과 타인의 목숨을 걸고 발악하는 것이 한심하기 그지없어.”

“아무것도 아니라면…?”

“너희들은 그들을 오버시어라고 부르는 것 같더라. 아무튼, 오버시어들은 자신들을 만들고 힘을 나눠준 신을 배신하고 심연 속에 가뒀지. 그들이 하고 싶은 ‘실험’에 방해가 됐거든. 그가 가진 만큼의 힘을 주었기 때문에 셋이 한꺼번에 덤비니 손도 못 쓰고 가둬졌지.”

“….”

“창조주가 되고 싶어 했거든. 자신의 피조물들이 서로를 죽이고 죽이면서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나 관찰하면서.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근원의 세계는 맘에 안 들었던 거지. 난 그저 혼란스러운 게 싫어서 정리하느라 만든 거였는데, 이럴 줄은 몰랐던 건 아니지만.”

 

알면서 했다는 게 웃기지, 그가 찻잔을 입에 대며 말을 마쳤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발악하는 제 일족이 불쌍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는 알베르가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없는 ‘무’에 도달하기 위해 이용당하는, 도달하는 것이 제 목표가 될 제 친우이자…. 생각의 바닷속에서 끝없이 침전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를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그리고 너는 그 약속을 지켰는데, 나는, 너에게, 무엇을…. 이봐, 아크. 낯익은 목소리와 낯선 말투가 수없는 자책 속에 빠진 나를 강제로 건져 올렸다.

 

“네게 이런 부탁을 하고 싶진 않았는데,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어?”

“들어보고 결정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눈앞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켜줘.”

“너와의 약속? 난 너와 약속을….”

“의식을 막는 게 고작이어서 미안해. 하지만 너라면 네 안의 증오를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 아크.”

“…! 잠깐만. 알베르, 너야? 알베….”

“… 자, 시간이 됐어. 여러모로 의미 없는 부탁이지만, 되도록 지켜주고. 네가 날 만난 걸 오버시어들이 알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가져갈 것들을 가져가겠어.”

 

잠깐이지만 익숙한 눈빛에 자리에서 솟구치듯 일어났다. 그가, 알베르가, 근원이 느릿하게 일어나 제 앞에 섰다. 그리고, 이마에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불빛이 하나, 둘, 꺼졌다. 그리고 머릿속에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찼다. 깨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잊고 싶지 않아, 나는 널, 사라지지 마, 가지 마, 제발.

 

알베르, 나는 널….

 

“마지막으로 보니까 만족해?”

“… 굳이 아크에게까지 거짓된 근원의 낙인을 줘야 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재밌잖아, 그리고 네 말처럼 쉽게 질 성격도 아니고.”

“이제는 아크의 모습이군.”

“삼키기 전 마지막 배려야, 싫으면 말고.”

“그럴 리 없잖아.”

 

너희도 참 재밌어, 그가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을 못 본 척 외면했다. 내 영혼의 일부를 바치면 아크를 살려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크에 대한 너의 마음을 내게 줘, 길게 고민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배신자의 허상뿐인 아크를 증오하게 될지라도 그가 살아있다면 다시 그를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 자신을 믿고 내린 결정이었다. 더는 미련 없어, 자, 어서 날 삼켜.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아크의 푸른 눈을 닮은 불빛이 하나, 둘, 켜졌다.

 

아크, 나는 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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