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스
요즘 들어 나는 최근에 꿈을 꾸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깊이 잠들지 않아도 꿈을 꾸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꿈을 꾸었다. 꿈은 보통 비현실적이고 화려한 모양새지만 나의 경우는 다르다. 마치 현실에서나 있을 법한 방이 항상 꿈에서 나타났다. 온통 하얀색 뿐인 것만 제외한다면.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공간 탓에 눈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공간에는 작은 하얀 탁자와 하얀 의자 2개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뿐이었다. 나는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는데. 하며 의아했지만 곧 요즘 힘들긴 힘든가 보구나, 하며 털어냈다. 하지만 두 번째 꿈에서도 똑같은 하얀방이 나왔다. 자각몽인가?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꿈속에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 그것을 자각몽이라 불렀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불러낼 수 있다고도 한다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게 되지 않는다. 베르딜에서 만났던 카라반 아이들을 불러보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거대한 하얀방에서 오직 나만. 혼자만.
세 번째에도, 네 번째에도, 그 다음 꿈에도 하얀방이 나왔다. 이제는 익숙하다. 다만 신기한 것이라면 이 자각몽은 아무래도 전과 이어지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바닥에는 내 발자국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처음 꿈을 꿨을 때, 이건 두 번째, 이건 세 번째, 그리고 이건 지금.
이번에도 같은 꿈인가? 슬슬 꿈이 아닌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적어도 누군가를 불러낼 수 있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저 문에서 내가 그리던 그리운 이들을 만난다면 좋을텐데. 탁자와 의자를 더불어 하얀방에는 하얀문이 있었다. 바깥에서 잠겨있는지 열어보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저 문이 열린다면 이 빛처럼 눈부신 하얀방을 나갈 수 있을까? 문득 호기심이 일었지만 금방 흥미를 잃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여긴 꿈속인걸.
"하하... 이젠 정이 들 지경인걸."
남겨진 나의 발자국들을 보며 머쓱하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이번에도 누구 안오려나~ 좀 심심한데."
자각몽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이건 이거대로 슬픈걸. 아크는 자신의 팔을 베개 삼아 그 위에 볼을 대고 엎드렸다. 무료함에 손가락으로 탁자를 딱, 딱, 쳐보기도 하고 스트레칭도 해보지만 심심한 건 어쩔 수 없는지 금방 지쳐버렸다. 슬슬 꿈에서 깨어날 때가 됐을텐데, 라고 생각하던 찰나,
끼익-
밖에서 잠겨있던 하얀 문이 열렸다. 아크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바로 일으키고 꼿꼿하게 앉아 문을 쳐다봤다.
뚜벅 뚜벅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 소리에 맞춰 아크의 심장도 같이 뛰었다. 몇 번만의 자각몽 끝에 드디어 누군가가 온 것인가? 그는 내심 설레어하며 들어오는 이를 기대한다. 그리고 발소리의 주인도 거대한 하얀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아크는 놀란 토끼눈 마냥 동공이 커졌다. 방 안으로 들어온 이는 다름아닌 알베르였기 때문이다. 아크는 당혹스러움에 말을 더듬었다.
"너... 너...!"
"오랜만이야, 아크."
"네가... 네가 왜 내 꿈속에서 나와?!"
아크는 화내듯이 쏘아붙였다. 알베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크에게 다가갔다.
"글쎄. 내가 네 꿈에 나오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어?"
자각몽도 이런 지독한 자각몽은 없을 것이다. 알베르는 무표정하게 의자를 끌어 앉았다. 아크는 경계하며 알베르를 노려봤다. 그런 행동에 알베르는 약간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너무 경계하지마. 여긴 네 꿈속이고, 난 아무짓도 안 해."
"왜... 왜 하필 그 많은 이들 중에 너냐고..."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에 알베르의 마음 한 켠이 쑤셨지만 얼굴은 평온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전장에서 만난다면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일도 없었겠지."
"......."
"우리 오랜만에 대화나 할까?"
알베르는 미소를 지었다. 기뻐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씁쓸해 보였다. 아크도 그런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조용히 경계하던 몸의 긴장을 풀고 편하게 고쳐앉았다. 무언의 승낙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꿈속의 하얀방 안에서 만큼은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농담을 하며 웃기도 했다. 마치 과거 사관학교에 다녔던 때가 생각나 한편으론 반갑기도 했고, 한편으론 착잡하기도 했다. 더 이상 과거처럼 지낼 수 없었기에. 우리는 변했고, 적이 되어 갈라졌다. 나는 살고자 몸부림 치는 자들을 위해, 알베르는 하이레프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즐기기로 마음 먹었다.
알베르가 처음 꿈에서 나오고 며칠 후. 오늘 밤도 역시나 하얀방으로 들어왔다. 하얀방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알베르의 발자국들도 남아있었다.
"신기하단 말이야. 여긴 분명 내 꿈속일텐데 말이지."
혹시라도 알베르가 또 들어올까봐 그는 몸을 추스리고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동시에 문이 열리고 이번에도 알베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아크."
"...난 이게 꿈이 아닌것만 같아."
"무슨 소리야?"
"그냥. 이게 정말 꿈인가 싶을 정도로 생생해서. 이런 자각몽은 나 말곤 아무도 못 꿀 거야."
아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얼마만일까? 과거의 친구였던 자의 앞에서 웃어본 것은. 알베르도 약하게 웃으며 앉았다.
"너는 여전히 네 마음에, 생각에 변함이 없는 거니?"
"어제도 말했지만, 변함 없어. 후회하지도 않고. 난 오히려 네가 변했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이 없잖아."
"알아. 하지만 꿈이니까 이런 말도 하지. 현실에선 이런 말은 죽어도 꺼내지 못했을 거야."
아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깍지를 끼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알베르에게 묻는다.
"소중한 자들을 지키고 싶어했던게 진심이 아니라고 했던거, 정말이야?"
이미 대답까지 확실하게 들은 질문. 하지만 혹시나 싶어, 마음이 변했을까 싶어 떨리는 마음으로 질문한다.
"......."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조용한 침묵 뿐. 아크는 표정이 일그러지고 마음의 상처 또한 조금 입었다.
"...그래. 말 안 해도 알겠어. 넌 내 꿈에서 조차도 변하지 않는구나. 내심 기대했는데."
"진심이 아니야."
"...어?"
"진심이 아니라고. 난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어. 수백년만에 널 다시 만나고 대립했던 날, 그 말은 진심이 아니야. 보는 눈이 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네가 나에게 미련을 가질까봐, 또 희생당할까봐 거짓말을 했던 거야."
"......."
알베르의 진심어린 대답을 들으니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꿈이지만, 어차피 곧 사라질 꿈이지만 한 번 더 듣고 싶어.
"정말...?"
"응. 정말."
비록 다시 만났을 때의 인상이 틀어지고 적으로써 갈라져 버렸지만,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말이 알베르의 입에서 나오니 아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 말을 듣고 싶었어."
웃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에 알베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도 이런 대답을 하고 싶었다는 듯. 부드럽게.
"같이 있었던 동안 네 눈물을 본 적은 별로 없었는데 말이지. 내가 널 울려버렸네."
"하하... 실없기는."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한 마디 해도 될까? 아크."
아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알베르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좋아해. 아주 많이."
"뭐야, 그런 말이었냐? 나도 널 많이 좋아했다고."
"그런 평범한 친구로서의 좋아해가 아니야. 나는 널 진심으로 좋아해. 친구 이상으로."
"...진심이야?
"알베르의 말에 아크는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얘가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좋아한다고? 그것도 친구 이상으로? 의아해하는 아크에게 확실하게 내꽂히는 대답.
"그래. 진심이야, 이것도. 널 지키고 싶은 것도 진심,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은 것도 진심, 너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도 진심이야. 널 좋아해, 아크. 그리고 지켜주고 싶어. 어떻게 해서라도, 너를."
"알베르..."
아크는 약간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정리되었는지 그도 알베르에게 진실된 마음을 전한다.
"나도."
"의외인걸. 정말로?"
"그래, 정말로. 나도 너와 마음이 같아. 널 좋아해.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랬는지도 몰라. 많이 좋아해. 친구 이상으로."
"그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알베르는 씩 웃어보였다. 정말로 과거로 돌아간 듯만 같았다. 아니, 그 이상으로.
"꿈에서라도 너의 마음을 들어서 다행이야, 아크."
"아, 그랬지. 오래 대화하다보니 꿈인 것도 까맣게 잊었어. 하지만 괜찮아. 많이 기뻤으니까. 하지만... 현실에선 절대로 이런 대화를 하지 못했겠지."
"그런 표정 짓지마. 언제든 이 하얀방에서 대화를 나누면 되잖아?"
"...그렇지. 다음에 볼 때도 대화해줄 거야?"
"물론.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네 꿈속에서 나타날 수 있어."
"그거 다행이네.“
"그럼, 몸 조심히 잘 지내.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알베르의 인사와 동시에 하얀방과 알베르가 흐릿해지더니 그대로 꿈에서 깨어났다. 일어나보니 그의 눈에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린 상태였다. 아크는 부스스 일어나 앉으며 살풋 웃었다.
"정말... 가능하다면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라니까."
계속 본다면 꿈속의 하얀방에서 대화하겠지. 지금도, 내일도, 똑같은 하얀방에서. 언제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