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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죽

 

 

절기에 접어든 계절의 새벽은 방에 난 창으로 푸르스름하게 스며들었다. 뜬눈으로 지새운 밤 나는 지옥문 입구에서 맴도는 망령처럼 흘러드는 새벽빛을 구원처럼 바라봤다. 통풍되지 않는 밀폐된 공간 안에서 나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잠든 아크의 등을 보고 있었다. 규칙적이고 느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와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숨을 내뱉는 코와 입술 위로 기류가 일었다. 우리를 가로지르는 세계의 분리였다. 아크는 막 잠에서 깨려는 듯 혹은 꿈속에서 헤매는 듯했다. 뒤척거리며 이불을 들춰내는 손길에 순순히 이불을 내줬다. 나를 이루는 껍질 한 겹이 천천히 벗겨졌다. 이제 방 안은 싸늘했다. 머리가 영 어지러웠고 정신은 흐리멍덩했다. 거친 숨을 내쉬는 등을 살살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아크의 머리카락에 코를 비비며 끌어안자 아크가 내 품속으로 몸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등을 더듬는 손길과 그 눈빛… 마주치면 마음의 단면이 첨예한 시선에 미끄러진다. 추락하는 아침이 밝았다.

 

 

 

세 번째 외래에서 의사는 나의 불면이 우울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인정했다. 처음부터 계속 이야기했던 부분이었으나 의사는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원인불명의 수면장애. 그것이 의사가 내린 진단이었다. 최근에 무엇을 했고 어떻게 지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들어주겠다는 멍청한 눈은 영 신뢰가 가지 않았다. 나를 우울증 환자 취급하며 상담 프로그램을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거절했다. 입원까지 운운하는 꼴이 영락없는 돌팔이였다. 전 그저 잠을 잘 수가 없을 뿐이에요. 그럼 뭘 원하세요? 수면제를 더 처방받았다. 사실 의사 이름은 분명 ‘돌팔이’가 맞다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병원을 나섰다. 내가 첫 번째 예약환자였다. 진료시간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고 이른 아침이었다. 집에 도착해도 아크는 아직 자고 있을 것이다. 근처 카페에서 간단한 브런치를 포장했다.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고요한 집 안에 울렸고 나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아크가 잠들어있는 방의 커튼을 고쳐서 치고 아크가 깨어날 동안 아침을 해결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운동을 시작했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관뒀다. 그 무엇도 내 불면을 도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녹초가 되어 쓰러질 때까지 러닝머신 위에서 발을 굴려도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다. 지친 몸이 더 지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주 죽지 않을 만큼만 재워 주겠다는 듯 한낮이 되면 드디어 잠이 쏟아질 때가 있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우리가 마주하는 하루는 지구의 절반과 같다. 아크의 세계가 한밤중일 때 나는 한낮에 살았다. 아크가 잠들어있는 동안 나는 잠들 수 없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순간 뒤바뀐 생활주기에 한동안 얼굴에서 피로함을 지울 수 없었다. 아크는 어떨까. 우리는 이 현상에 대해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둘 다 깨어있는 채로 마주하는 날이 적을뿐더러 나는 언제나 피곤했고 아크는 오래 취한 숙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앉은 채로 한 끼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로를 흘끔댈 뿐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매번 다르게 보였다. 아크는 나에게 잠은 좀 잤어, 하고 묻고 나는 어 하고 대답한다. 아크의 눈동자는 점점 투명하고 까슬해진다. 섬세한 유리공예 같은 눈동자는 갈수록 질량을 덜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사이에 싹트는 간극의 증명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커지는 간극은 크레바스처럼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잘려나가는 지구의 단면을 접착하고 싶었다.

 

 

 

깼을 땐 저녁이었다. 잠들기 전에 소파에 앉아있었던 몸은 누운 채였고 일으키자 담요가 밑으로 떨어졌다. 부엌에서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담요는 아크가 덮어준 거라는 걸 알았다. 아크? 하고 부르자 익숙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이틀 만이었다. 잠깐만. 하고 말한 후에 옷에 물기를 쓱쓱 닦으며 아크가 걸어 나왔다.

 

“네가 사다둔 건 다 식었길래. 그냥 시리얼 먹었어.”

“잘했어.”

“간만에 잤네. 잘 잤어?”

“응…. 보고 싶었어.”

 

나도…. 하는 새삼스레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오랜만이었다. 무해하고 솔직한 웃음을 보고 있으니 이 순간만큼은 우리가 같은 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보고 싶었다는 겨우 한 마디로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속이 울렁거렸다. 어디 멀리 갔다 온 사람처럼…. 아득해지는 감정에 아크를 내 옆에 앉게 했다. 아크는 순순히 털썩 앉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슬쩍 기댔다. 얼마 만에 느끼는 안정감이지? 한참을 그러고 있다 아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나가서 조금 걸을까? 목이 잠겨 뻐끔뻐끔한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쉴 새 없이 달린다. 벌써 깜깜한 하늘에 불과 며칠 전의 여름을 잠시 떠올렸다. 우리는 집 앞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들고 걸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면 아크의 잠옷 비슷한 반바지가 펄럭거렸다. 슬리퍼 끄는 소리와 아이스크림 무는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었지만 오가는 말은 없었다. 동네의 작은 공원 주변을 돌았다. 도로 옆의 공원은 낮엔 자동차 소음으로 시끄러운 곳인데 밤이 되니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고 가로등 불빛은 간격을 두고 깜빡거렸다. 이렇게 어두운 길이었던가? 당장 한발 앞이 꺼질 것 같이…. 여전히 말이 없는 아크의 옆모습은 가로등 빛에 그늘져 어떤 얼굴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역시 불면의 원인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당장 생각나는 것이 없어 막연하게 이것이 꼭 나에게 주어진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통의 간극, 이유 모를 현상, 희미해지는 감각 그리고 내가 모르는 아크의 얼굴. 무엇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 나를 흔들었다. 거스를 수 없는 몇 날 며칠의 밤 아크의 감은 두 눈을 보며 나는 끝없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흘러들었지만 제대로 기억나는 건 없었다. 아크는 무슨 꿈을 꿀까,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영원한 밤 속에서 나를 잊어버리진 않을까, 영영 깨어나지 않는 건 아닐까…. 꿈조차 꾸지 않는 나는 아크와 나누고 싶은 말이 많았다. 내가 없는 곳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이 분리를 멈출 순 없을지, 아직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우리 떠나자.

 

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아크는 내 팔을 흔들었다. 미안, 뭐라고? 아크는 졸려 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선 내 얼굴을 붙잡고, 또 뭐라고 하려다가, 나를 덥석 끌어안고 업어줘, 그랬다. 주저앉아 등 위로 쏟아지는 아크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아크는 아까 뭐라고 하려고 했어? 하고 물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소리조차 잠잠해졌다. 아크를 등에 업고 되돌아가며 돌팔이 의사의 진단을 떠올렸다. 불면이 왜 시작되었는지 끝을 보는 방법이 뭔지 처음에는 궁금하고 답답했던 것들 더는 상관없었다. 나는 아크를 데리고 떠난다. 상담 프로그램이나 수면제나 아니면 돌팔이 의사의 둥둥 뜬 얼굴이나… 그것들은 떠나는 데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등과 두 발에 원인불명의 불면인지 우울인지 모를 것을 얹은 채로 영원한 낮을 향해 수천 킬로미터를 횡단할 것이다. 우리의 병이나 현상 비슷한 것 지금 당장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찾는 것이다. 오직 낮만이 있는 곳으로. 잠들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점점 가벼워지는 푸르고 투명한 눈동자가 강렬한 태양빛에 찌푸려지는 곳으로. 언제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나 견딜 수 있었다. 내 위로 얹어진 무게 모두 견딜 수 있었다. 이 계획을 아크에게 직접 전하고 싶었지만, 미동 없는 몸이 들었을지 아닐지 알 수 없어 들었느냐고 묻지 못했다.

 

 

극 가까이 가면 낮의 연속인 계절이 있다. 그곳에서도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라 우리의 해답을 찾으려면 지구의 공전을 멈추는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빛보다 빠르게 걸어 태양으로 향하는 경로를 탐색할 수도 있다. 스스로도 말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능할 거라는 마음도 들었다. 등 뒤로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착각이 들었다. 아주 추운 곳에서 혹은 아주 더운 곳에서 계절의 새로운 이름을 찾는 상상을 했다. 통풍되지 않아 틈새로 새벽이 창을 두드리는 신호로 깨어야 하는 방. 모든 것이 아래로 추락하는 그 방을 벗어나 아크가 두 눈에 빛을 머금은 채로 다시 날 바라보며 그 말을 해주는…. 아크는 아까 울 것 같은 얼굴을 했지. 못 들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떠나기 싫은 걸까 아니면 내가 또 피곤한 얼굴을 했던가? 조금 전 내 얼굴이 어땠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크는 여전히 그 방 안에 자고 있고 나는 극으로 갈 준비를 한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또렷했다. 아크를 깨웠다. 커튼을 치고, 방 안이 밝아지면 더 이상 싸늘하지 않았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아크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크가 피식 웃었다. 왜 깨워….

 

가자, 아크.

 

잠시만……. 이제 가야 해. 아크는 알겠다니까, 하고 내 뺨을 살살 문질렀다. 가자. 아크는 웅얼거리며 침대 구석으로 굴러갔다. 이리와 알베르. 조르는 목소리에 결국 침대 끄트머리에 살짝 누웠다. 겉옷을 입은 채라 올라가는 온도에 땀이 비질비질 났다. 잠들지 못하는 지난밤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저 스쳐 지나갈 뿐, 그것들은 더 이상 나를 잡아둘 수 없었다. 오늘이야말로 떠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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