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뉴엘
Moonlight
어제와 같은 날이었다. 집무실 책상 위로 하얗게 스며드는 햇살도, 제 숨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이 공간에 홀로 앉아있는 것도. 알베르는 등 뒤의 창문 너머로 손을 뻗친 창백한 빛줄기 위를 부유하는 먼지 입자들 속에서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에 환멸감을 느꼈다. 여전히 태양은 떠 있고 하늘은 푸르며 저는 살아있다. 다만, 너를 제외하고. 아크. 알베르는 너무도 그립지만 이제 떠올릴 때마다 제 심장을 후벼 파는 이름을 기어코 입술에 올렸다. 빛을 받아 새하얗게 질린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 보던 알베르는 이 손이 덜 여물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두 눈을 감아버렸다.
‘우리 다음에 여기로 또 달 보러 오자.’
언제였더라. 아, 그래. 군 사관학교 졸업을 한 1년 즈음 남겨두었을 즈음에 지역탐사라 쓰고 소풍이라 부르는 것을 학교에서 보내줬었다. 물론 학교 측에선 하이레프가 점령한 행성의 군사적 요충지인 곳을 직접 탐방하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요새를 두 눈으로 확인하라고 보내줬겠지만 햇병아리들이 그걸 알았겠는가. 그저 앞에선 선생이 바라는 대로 대답만 잘할 뿐 뒤돌면 밤을 지새우며 무얼 해야 할지 속닥거리느라 바빴으니까. 오랜만에 지긋지긋한 학교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느라 눈앞의 천연 요새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나 자신이나 똑같았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발 빠른 동기가 물어온 정보는 꽤나 귀가 솔깃했다. 야야, 내가 말이야 방금 이 지역 토박이인 상인한테 들었는데 말이지. 저기 우리가 머물 숙소 뒤편에 엄청 큰 호수가 있는데 달이 뜨는 한 밤중에 나가면 그렇게나 예쁘다더라. 그리고…
‘우리가 또 저 달을 보러 올 수 있을까?’
‘없을 건 뭐 있어. 나중에 우리 군인 되고 나서 휴가 받았을 때 오늘처럼 보름달이 뜨는 날에 한번 들리면 되지.’
‘기껏 받은 휴가를 이 곳에서 보낼 생각하다니, 아크 너답다.’
‘왜, 싫어?’
‘아니.’
-그리고 호수에 비친 달에 소원을 빌면 달이 그 소원을 들어준다던 전설도 있던데?
지금 생각해보면 퍽이나 부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때의 저들은 왜이리 순수했던지. 버석버석 마른 웃음이 입술 사이로 힘없이 세어 나왔지만 알베르는 두 눈을 감은 지금도 그 날을 그려보자면 그 날 아름다운 호수의 풍경이 눈에 훤했다. 숙소 점호시간이 한참 지난 밤 중에 용케도 몰래 숙소 밖으로 빠져 나오는 것에 성공했던 그들은 혹여 누가 자신들을 발견할까 싶어 재빠르되 은밀히 발걸음을 옮겼더랬다. 그들의 동기가 그 날 낮에 말했던 호수를 찾아서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 좁게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걷다 서로 눈 마주치면 키득키득 웃으며 발을 나란히 했었다. 꿈결에 젖은 낙엽을 지르밟으며, 둘의 은밀한 산책을 지켜보던 풀벌레의 낮은 허밍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리고 머지않아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둘은 차마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밤하늘을 퍼다 가득 채워놓은 듯이 잔잔히 출렁이는 호수 위에 별빛을 한 움큼 쥐어다 흩뿌린 것마냥 찬란히 바스러지는 별빛들이 침잠할 즈음이면 그 위를 딛고 선 새파란 둥근 달이 우아하게 저희를 굽어보던 그 날. 숨막힐 듯이 신비로운 달빛이 그들을 따스하게 품어주던 날이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검은 나뭇잎들이 서로 속살이며 그들의 달빛 아래 밀회를 부러워하던 순간이었다. 은색의 달빛이 곱게 발린 서로의 뺨을 마주보고 부드러이 휘어진 눈매를 같이 하며 그 날의 우리가 무어라 약속했더라.
‘그럼 우리 다음에도 같이 이 호수에 달 보러 오는 거다?’
‘좋아.’
‘뭐하고 있어. 너도 같이 호수에 뜬 달에 빌어. 우리가 같이 여기에 다시 달 보러 올 수 있게 해달라고.’
그걸 믿다니, 너답다.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었지만 계속 눈을 흘기는 네 눈초리에 나도 마지못해 빌었었다. 다음에 또 너와 함께 이 곳에서 달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우리가 생사를 넘나들며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기필코 살아남아 다시금 이 곳에 함께 서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하게 해달라고. 하지만 나는 기도에 집중하려는 듯 두 눈을 꼭 감고 입술을 조금씩 달싹이기까지 하는 너와는 달리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네가 황홀한 달빛에 취해 달에 비는 동안 나는 황홀한 네게 취해있었으니. 내리 깔린 두 눈이 하얀 뺨 위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비가 날개를 접는 양 파르르 떨리는 것부터 너의 붉은 입술이 내가 모를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까지 모두 내 안에 담아두느라 달에게 빌 마음이 없었다.
-만약 내가 그 날 너처럼 진지하게 기도를 했다면 너와 난 한 번 더 그 달을 함께 볼 수 있었을까?
‘뭐야 벌써 다 빌었어? 빠르네, 알베르.’
‘...네가 느린 거야.’
‘아니거든! 아무튼 달이 우리 소원 들어줬으면 좋겠다.’
배시시 웃으며 말을 마친 네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달빛으로 촘촘히 짜인 면사포를 드리운 채 성스러운 어느 성인처럼 간절히 기도하던 너의 감겼던 두 눈이 뜨이고 맑은 회청빛 눈동자가 나만을 오롯이 담던 그 순간이 내게 얼마나 숨 막혔던지 넌 모르겠지. 투덜거리다가도 픽 웃음을 흘리다 해사하게 너와 내가 미래에도 함께하길 바란다 말했던 네 붉은 입술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넌 모를 거야. 내가 네게 품었던 감정을 채 전하기도 전에 너는 내 곁에서 저 멀리 떠나버렸으니.
알베르는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찰나의 백일몽은 그에게 쓰디쓴 절망만을 선사해 줄 따름이었다. 잠깐의 달콤한 여운을 채 목으로 넘기기 전에 현실은 그의 턱을 우악스럽게 틀어쥐곤 처절한 그의 처지를 목구멍에 쑤셔 박아주었으니. 아무도 없는 텅 빈 제 공간을 바라보다 알베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간 때를 놓치고 말 테니. 알베르가 자신의 집무실 문 밖으로 나오자 때마침 저를 찾아온 직속부하가 그에게 가벼이 경례를 취하며 말을 건넸다.
“레프에게 영광을. 대령님 오늘도 혹시 그 곳에 가시는 겁니까?”
“우리에게 승리를. 그렇다. 급한 일이 있다면 연락하도록. 그리고 내가 부탁한 것은?”
“아, 여기 있습니다.”
알베르는 부하가 넘겨준 술병을 건네받으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함께 달을 보러 가기로 한 친구는 그의 곁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련하리만큼 매년마다 그와 아크가 함께 달을 보았던 날마다 휴가를 내서라도 홀로 달을 보러 떠났다. 술잔을 건넬 이 없더라도 잔을 2개씩 챙겨 들고서. 비록 두 잔은 늘 투명하고 맑은 술이 찰랑였지만 알베르의 맞은 편 잔은 단 한 번도 비워진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호수에 뜬 달을 보러 떠났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이를 기다리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혼자서라도 찾아갈 것이었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알베르는 제게 거수경례하는 부하에게 가벼이 고갯짓을 한 뒤 복도를 걸어 나갔다. 둔탁한 군화 구두굽 소리가 황량한 복도에 부딪히며 쓸쓸히 울려 퍼지다 흐려지는 그의 그림자와 함께 사그라졌다.
* * *
[우,우움.. 그럼 못 만나는 건가?]
“미안. 소중한 사람이랑 한 약속이 오늘 있어서. 다른 날은 괜찮은데.”
[괜찮아. 아크가 그렇게 말하는 거라면 정말 중요한 거겠지. 우리는 오늘이 지나면 떠날 거거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행운을 빌어.]
“그래, 너희도 낙원을 찾을 수 있길 바랄게.”
아크는 통신이 끊긴 전파장치를 가만히 내려 보다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타오르던 하늘은 땅에서 피어 오른 짙푸르다 못해 남빛 기운에 섞여 들어 몽환적인 보랏빛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의 카라반 친구들과 저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단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고 먼저 제안했지만 아크는 아쉬운 마음을 내리누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비록 오늘처럼 운 좋게 낙원을 찾으러 떠났던 카라반 친구들과 만날 수 있었을 수 있을 소중한 기회가 자주 오리라곤 그 또한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이번 기회가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늘은, 오늘만큼은 아크도 어쩔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이었으니. 물론 당사자는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크는 쓴 웃음을 입가에 덧바르곤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눈으로 더듬어 보았다. 아마도 이 길이었던 거 같은데. 오랜만에 다시 찾은 이 곳은 다행히 그의 기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의 그의 곁엔 아무도 없다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내딛는 걸음은 거침없었다.
그가 좁은 오솔길로 들어설 즈음 어느 새 주변엔 어둑한 밤이 내려앉아있었다. 불그스름하니 빛났던 나뭇잎들은 두터운 어둠을 덮은 채 아크가 지나갈 적마다 차르르 몸을 떨며 속살거렸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기 1년 전쯤이었던가. 학교에서 보내줬던 지역탐방 때 알베르와 함께 숙소 뒤에 있는 호수와 그 위에 아름답게 떠 있던 달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소소한 일탈거리라 생각하여 벌인 충동적인 외출이었다. 동기의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얻어들을 즈음 때마침 그 녀석과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고 장난기가 반짝이는 그 신록빛 눈동자에 대고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것이 이리 오랫동안 두고두고 떠올릴 추억거릴 만들어 줄줄은 몰랐다. 정말 아름다웠었는데. 아크는 희미하게 떠오른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그 날의 추억을 떠올렸다. 호수 위에서 춤추는 실바람에 잔물결이 일렁이며 호수에 떠오른 달빛을 조각 내 그들에게 떠밀어 주었던 그 때. 바람이 건네준 달빛을 들이받으며 새하얀 달빛에 젖은 채 마주보며 웃었던, 세상에 오롯이 그들과 호수와 달 밖에 없는 기분이었던 그 때. 그리고 서로가 함께 할 미래를 빌었던 그 찬란한 순간.
“…역시 그 전설은 거짓말이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제 처지가 설명될 수 없었다. 호수에 뜬 달을 보며 소원을 빌면 들어주긴 무슨. 지금 나와 알베르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아크의 낯이 설핏 굳었다. 촉촉한 과거에 젖어있던 가슴이 다른 의미로 울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쩌다 이리 멀어지게 되었을까. 우리는 결코 그 날의 우리로 되돌아갈 수 없으리라. 아크는 꽤나 오랫동안 사람이 찾지 않았는지 풀이 무성한 오솔길을 팔로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슬슬 이 정도 들어왔으면 호수가 보일 때가 됐는데. 아크가 제 눈가에 드리워진 나뭇가지를 밀어내며 속으로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수백 년 전의 그 날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호수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별들이 내리 앉은 잔잔한 호수 위로 저를 품을 듯이 커다랗고 둥근 달이 발끝만 수면에 적시며 그를 자애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크는 그 커다란 달을 등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곤 그대로 굳어버렸다. 빛을 등지고 서 있어 짙게 드리운 검은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크는 크게 뜨인 채 저를 바라보는 찬연한 녹음이 차오른 눈매는 절대 못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크는 밤바람이 그들 사이로 내리깔린 침묵을 훑고 지나가며 남긴 호수의 향취 취한 기분이었다. 아크는 그들에게 드리워진 달빛의 장막 속에 숨어 현실과 격리된 이 상황이 아니라면 두 번 다시 이렇게 부를 수 있으리라 상상치 못한 이름을 간신히 입 밖으로 터놓았다.
“...알베르.”
울듯이 상냥하게 흘러나온 이름의 주인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아크를 살피다 한숨 쉬듯 처연히 웃으며 답을 주었다.
“......안녕, 아크.”
-수백 년 만의 재회였지만 그들은 과거의 그 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호수에 비친 달은 언젠가 덜 여물었던 두 청년의 오랜 소원이 불안정한 호흡에 이뤄져 가는 것에도 그저 침묵할 따름이었다. 마치 그 날처럼.
* * *
“...네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크는 알베르의 대답에 아무 말 없이 다가와 그의 곁에 섰다. 무어라 입술을 떼기 전 아크는 잔디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술병과 두 개의 잔을 발견하곤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방금 전까지 알베르가 앉아있었는지 눌려있는 자국이 남아있는 곳을 훑곤 그 옆 자리에 앉았다. 빛바랜 붉은 망토가 하찮은 잔디들 위를 품어주는 걸 가만히 훑던 알베르도 원래 앉았던 자리에 다시금 앉은 채로 홀로 비우던 술잔을 쥐어들었다. 알베르는 눈을 내리깐 채 서늘한 술잔에 입 맞추다 나직이 운을 떼는 아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곧은 회청빛 눈으로, 아니 이제는 한 쪽만 푸른 눈으로 그의 속을 꿰뚫을 듯이 눈을 맞춰왔다. 알베르는 어쩐지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껄끄러워 시선을 먼저 피하곤 별빛이 치는 물장구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호수로 눈길을 옮겼다.
“이 술잔은 누구 거야?”
“......”
“누구를 기다리고 있던 거야?”
아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평온하기 그지없는 호수마냥 알베르는 그저 무심한 낯으로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던 액체는 빈 내벽을 긁어내리며 속을 찌르르하게 만들었다. 속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가 그의 척추를 타고 기어 올라와 눈가를 발긋하게 물들였다. 그것이 술 때문인지 혹은... 알베르는 호수에 두었던 시선을 다시 거둬들이곤 아크의 손엔 들려있었지만 여전히 비워지지 않은 잔을 흘깃 보며 처음 인사를 건넸던 이후로 처음 말문을 열었다.
“...오늘만이야.”
“......”
“전에 말했었지. 다음에 만나면 적이라고. 하지만 오늘은, 여기에서만큼은. ...여기서 싸우기엔 아름다운 풍경을 망치는 꼴이니까,”
“우리의 아름다운 과거를 망칠까봐, 가 아니라?”
비록 잔의 내용물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알베르는 수백 년이 지나고 나서야 잔이 주인을 찾았다는 것에 썩 기꺼운 마음으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가 얼기설기 엮어 만든 서툰 가식으로 가려두고자 했던 핵심을 가차 없이 내지르는 아크의 말에 알베르는 다시금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었기에. 그럼 어떻게 말할까? 네겐 그저 몇 년 전에 있었던 찰나의 아름다운 기억이 내겐 네가 없었던 수백 년의 지옥을 버텨오는 데 도움을 줬던 해묵은 동아줄이란 걸? 사실 오늘 만이 아니라 작년에도, 제작 년에도, 그리고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도 나는 홀로 이 곳을 지키고 있었다는 걸? 그 머저리 같은 짓을 하면서도 꼬박꼬박 네 술잔은 챙겨들고 왔다는 걸? 이걸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저 한 잔의 술에 녹여 진득하고 케케묵은 연정을 어제처럼 삼킬 뿐이었다. 알베르는 오늘따라 목으로 넘어가는 술의 뒤끝이 유독 쓰다 생각할 즈음 아크가 술을 한 입에 털어놓곤 오만상을 쓰는 꼴을 발견했다. 채 다듬지 못한 웃음이 알베르의 입술 사이로 튀어나왔으나 그보다 아크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먼저 터졌다.
“으! 이런 걸 어떻게 혼자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키고 있던 거야?”
“네가 어린 거야.”
“네가 늙은 거겠지.”
투덜거리며 술잔에 남아있던 술 한 방울을 바닥에 탈탈 털어버리는 아크의 모습을 지켜보던 알베르는 제 입 꼬리에 자연스레 걸려있던 미소를 금세 지워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달이 저물고 해가 뜨는 순간 이 기억 또한 어느 날의 허상이 되어버리겠지. 그럼에도 알베르는 자신의 빈 잔에 술병을 기울이곤 비어있는 아크의 잔에도 투명한 액체가 찰랑이게끔 채워주었다. 청아한 소리와 함께 달빛이 섞여든 술이 제 잔을 채우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크는 무언가가 화가난듯 인상을 찌푸린 채로 알베르를 불렀다. 마치 그의 잔에 이마를 맞대고 있던 술병의 입구에서 마지막 방울이 애처롭게 매달려있다 파르르 떨며 추락하는 듯한 목소리로.
“...알베르.”
아크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 알베르는 문득 생각했다. 이대로 시간이 멎어버렸음 좋겠다고. 영영.
“너는, 여전히 하이레프의 군인이겠지?”
째깍. 하지만 매정하게도 초침은 좌절하는 그를 비웃으며 냉담히 스쳐지나갔다.
“...당연한 것을.”
“......그래.”
아크는 쓴 웃음을 베어 물으며 다시금 차오른 잔에 비친 둥근 달을 슬프게 두 눈에 담았다. 그래, 우리는 너무나도 멀리 온 거겠지. 다시는 그 때처럼 행복하게 웃으며 함께할 수 없겠지. 오늘 이렇게 같이 달을 본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울 테니까. 아크는 서글픈 낯으로 잔을 쥔 손에 힘을 주다 잔 위로 그윽하게 떠오른 둥근 달을 한 숨에 삼켰다. 온갖 인상을 다 쓰면서도 기어코 잔을 비워내는 아크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뇌리에 박아 넣던 알베르는 이 곳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아무런 언질도 없이 가능하면 아크에게 매정하게 보이게끔 몸을 돌려 걸음을 이어나갔다. 아크는 냉정할 정도로 제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으며 자리를 뜨는 알베르의 모습에 울컥했다. 이미 텅 비어버린 잔을 쥔 손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실렸지만 아크는 제게 등을 보이며 떠나가는 알베르의 걸음이 멀어지기 직전에 뒤돌지 않은 채로 나직이 읊조렸다. 가능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게끔. 마치, 그와 자신이 먼 옛날 사관학도였을 때 내일 보자며 헤어질 때의 인사처럼.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었네.”
아크는 제게서 멀어져가던 걸음 소리가 멎은 것에 흐리게 웃고는 고개를 들어 과거와 다른 저희를 이전처럼 새하얀 달빛으로 보듬어주던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괜히 눈물이 차오를 만큼. 아크는 제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물안개가 점점 짙어져 새까만 하늘과 땅이 하나로 어물거리며 혼란이 섞이게 만드는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달은 곧게 빛나고 있다는 것에 기뻐하며 환히 웃은 채로 말을 이었다.
“달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거. 우리의 소원을 들어줬잖아.”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네 소원이겠지. 내 소원은 반쪽 밖에 안 들어줬거든.”
-그런데 또 모르지. 우리가 다시 함께 저 달을 보게 된다면 내 남은 소원까지 들어줄지도.
아크는 뒤에서 들려오는 알베르의 목소리에 재빨리 뒤돌았지만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자욱이 차오른 어둠과 그 위로 겹겹이 덮인 나뭇잎들 사이엔 알베르의 흔적은 조금도 남지 않았지만 아크는 알베르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다 그 어느 때보다 해사하게 웃으며 달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이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자신들은 적으로서 서로의 목에 무기를 들이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크는 호수에 뜬 아름다운 달이 선사해준 선물같은 지금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빛무리가 이지러지는 가운데에서 찬연히 빛나는 달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의 소중한 이가 더 아름다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