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루냥
-알베르, 내가 죽는다면 어떨 거 같아?
교정에 햇살이 가득하고, 적당한 시원함을 머금은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 항상 책상에 늘어져있던 동기 녀석마저 산책하러 나오는 날씨에, 아크는 뜬금없이 내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칙칙한 회색 군복과 바람에 맞춰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짧고 강렬한 붉은 머리만이 보였을 뿐이었다. 알베르는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그 꼿꼿한 등을 계속 바라보았으나, 알베르의 머리에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건 왜?
-그냥, 졸업하면 전쟁터에 나갈 거잖아? 언제나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야.
아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깔렸다. 혹시 엊그제 돌아간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크가 말이 없었으니 알베르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크의 마음에 작지 않은 파도가 생겨났다는 것을 알베르는 느낄 수 있었다. 알베르는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아직은 하얗고 말끔해 보이는 작은 손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 작은 손에 자신의 긴 손가락을 걸면서 무어라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그 말을 들은 아크가 환하게 웃었고, 그 웃는 모습을 본 저도 따라 환하게 웃었던 사실만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휘어지는 파란 하늘을 닮은 눈동자를 담은 눈매와 그와 대비되지만, 불꽃 같은 머리카락은 누가 봐도 예쁜 그림이었다.
-아크, 그만 미련 버려.
-그렇지만, 알베르! 이건 학살이야!
결국 아크의 눈에는 눈물까지 보였다. 비록 울지 않으려는 듯 입술을 꾹 깨물긴 했어도 알 수 있었다. 아크는 항상 방긋방긋 웃는 아이였고, 공부하라는 선생님들의 타박에도 꿋꿋하게 미소를 보이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 눈에서 눈물이 보이려면 얼마나 많은 부정적 감정들이 속에서 뒤섞여 쌓여야 했을까.
-행위까지 아름답길 바라는 건, 이상일 뿐이야.
전쟁터에 나온 뒤 아크는 계속해서 하이레프의 가치관에 의문을 가졌다. 그런 아크가 걱정되어 상관에게 요청해 휴가라도 내어 보내줄까 했지만, 그건 아크가 원치 않았다. 정신적인 충격과 몸의 피로가 더해 아크는 날이 다르게 창백해지고 말라갔다. 마치 우리가 생명을 뽑아냈던 행성들처럼.
끝내 아크는 무너졌다. 자신이 황량한 벌판에 혼자 서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뼈에 사무치게 느낀 듯싶었다. 그 애는 침대에 엎드려졌다. 무너진 어깨가 들썩거리고, 거친 숨이 입에서 삐져나왔다.
나는 그런 아크의 등을 다독여줄 수만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화를 위한 길은 언제나 순탄하지 않다. 우리는 그런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었고. 나약하다고도 생각했다. 다른 군인들도 전부 이 정도는 각오하고 겪고 있었다. 아크만이 이런 상황을 비정상적이라고 취급했다. 그렇지만, 군대 내에서 비정상인 사람은 아크였다. 아무도 우리의 이상에 의문을 단 적이 없었으니까. 오직 아크만이 그러했다.
아크는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학교에 있을 때처럼 발랄하긴 했어도 숨길 수 없는 우울함이 잔뜩 묻어나왔다. 그때라도 널 되돌려보냈다면 좋았을걸.
-알베르? 어째서...여기에...
의식은 꽤나 고통스러웠는지, 너는 힘이 다 빠진 모습이었다. 목소리도 얇고 곧 멈춰버릴 것만 같이 뚝뚝 끊어져 내렸다. 너를 돌려보냈다면 어떨까. 이런저런 가정들이 머리를 헤집었지만,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의식은 시작되었고, 너는 사랑스럽던 아크가 아닌 내가 모르는 무언가로 변해버릴 터였다.
-아크, 나는 너를 이해 못 하겠어.
그 야만족들의 위해서 너는 나서면 안 되었다. 그 마음들은 실제로도 너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막사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고, 발톱을 내밀면서 싸울 때부터 예정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다만, 아크가 실제로 그러지 못하겠지 하고 방심한 내 탓도 어느 정도는 있었을 테다.
-대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였는지도.
전장 이탈이라니. 지휘관이 실험에 미쳐있는 림보 준장이 아니었더라면 당장이라도 수도에 끌려가 광기에 넘치는 사람들이 가득한 관중들 앞에서 목이 잘렸을 터였다.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가는 의식 속에서 아크는 철저한 조롱 속에서 홀로 고독하게 죽어갔겠지.
그런 모습의 너를 상상하자니 속에서부터 뜨거운 불이 올라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이 감정을. 아크 예전의 너였다면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내려줄 수 있을까.
-배신의 대가는 처참해. 이건 너무 뻔한 결과잖아?
-알, 베...르...
흐리멍텅한 눈동자가 알베르를 바라보았다. 한쪽 눈은 이미 무언가에 잠겨서 노랗게 물들었다. 은은한 촛불 빛이 눈에 담겨있네. 손을 들어 하얀 볼을 쓰다듬었다. 얼굴에 난 의미 모를 흉터가 깊었다. 아마 평생 지워지지 않겠지. 아크에게는 지금 이 순간은 잊히는 게 좋을 터였다. 너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이니까.
바보 같지. 알베르는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대었다. 널 뭐라 해야 좋을까, 아크. 종교라기엔 자신은 맹목적으로 아크를 섬기지 못했고, 사랑이라기엔 아크에 대한 감정이 너무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넌 참 어려운 아이야, 아크. 하나부터 열까지 답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헤치고, 헤칠수록 더 어려운 문제가 나타나지.
-하지만 나는 너를 지킬 거야. 모든 걸. 내 전부를 걸어서라도.
나의 아크. 결국에 너를 설명하는 단어는 이것 밖에 찾지못했다. 사실 나의 라는 말을 붙여도 되는 건지도 의심스러웠지만. 아크의 향이 내게서 멀어졌다. 의식은 점점 더 진행되어가고 있었고 늦으면 아크는 진짜 빈껍데기만 남아버리겠지. 개인적인 욕심으로 인해 너를 저 바닥 끝까지 망쳐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좋아하면 그 사람의 행동을 닮는다더니, 나도 너를 따라 멍청이가 되어 버린 게 아닐까, 아크. 붉은 머리가 얼굴을 간질이다가 이내 멀리 떨어졌다. 너를 구하면 내 위치도 위험해지겠지. 그렇지만, 아크 이 세상에 내게 너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이내 의식의 전체가 보였다. 발바닥을 땅에 굳건하게 붙이고, 팔을 뻗었다.
-의식을 멈추겠어.
과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너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할까. 다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 뿐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저릿했다. 죽을 수도 있었고,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네가 죽었다는 증거를 꾸미기 위해서 바쁠 터였다. 림보 준장은 네가 없어졌다는 사실 하나로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네가 완전하게 안전하기 위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의 세세한 작업이 필요했다.
너에게 입 맞추어도 될까. 어릴 적 동화에서는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에 서로 달큰한 입맞춤을 하곤 했었다. 지금 비록 이 비극적인 순간이지만, 한 번이라도 너에게 닿을 수 있을까, 아크.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앞으로의 내 미래를 위해서 한 번만이라도 될까. 나의 아크.
그렇지만, 너는 내 생각을 용납하지 못하겠는지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미약한 숨소리였지만, 네 곁에 오래 버텨온 나는 알 수 있는 소리였다. 우리의 행위는 학살이라며 네가 무너졌을 때 내었던 그 소리였다.
-안녕, 아크.
손을 뻗었다. 빛이 터졌다. 아주 간단한 과정이었지만, 그 파괴력은 대단했다. 순간 폭음이 귀청을 뒤덮었지만, 그 하얀 빛 와중에도 사라져가는 네 모습이 보였다. 그런 너에게 마지막으로 닿고 싶어서 손을 뻗었지만, 너는 허무하게 사라졌다. 내 손에 한 번 닿여주지 않은 채로, 그렇게.
무심도 하지. 나는 단 한 번도 네가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는데, 너는 언제나 다른 곳을 향해 눈을 돌려버려. 그런 점이 좋기도 하지만, 너무 아파. 나는 눈을 감았다. 아크는 이제 제 손에 닿이지 않을 것이었다. 닿을 수 있었던 너를 포기해도, 네가 살아 움직일 수 있다면 지금이 괜찮아. 너를 위해서 내 아픔 정도는 가슴 깊숙이 묻어둘 수 있으니까.
-아크.
그 지옥에서도 살아 돌아온 나의 아크. 비록 진행된 의식을 온전하게 막지는 못했는지 한 팔이 스펙터처럼 변하긴 했어도 아크였다. 마지막으로 의식 도중에 보았을 때와 비교해서 크게 자라지도 않았고, 멍한 눈 또한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면서 그때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의 아크, 오늘도 살아있었구나. 그렇다면 그걸로 됐어.
내 아픔 정도는 너를 위해 묻어줄테니.








